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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이집트 원정과 로제타석: 실패 이유와 영국행 경위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이 나일 해전 이후 어떻게 무너졌는지, 1799년 발견된 로제타석이 왜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는지를 날짜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역사쌤알려줌 편집팀

· 11분 분량

2026년 10월 25일 기준 ·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 연표, 월리스 버지 『로제타석』(대영박물관 간행) 기준

대영박물관에 전시된 로제타석 실물 사진입니다.

로제타석은 프랑스군이 찾았지만 지금은 런던 대영박물관에 있어요. 원정군이 바다에서 함대를 잃고 고립됐다가 끝내 항복했기 때문이에요. 원정은 1798년에 시작해 1801년 항복으로 끝났어요. 항복 조약에 따라 돌이 영국 손에 넘어갔고, 그 뒤로 쭉 대영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어요.

이집트 원정은 언제, 어떤 규모로 시작됐나요?

대영박물관에서 로제타석을 본 A씨가 있다고 해 볼게요. 돌은 프랑스군이 찾았는데, 지금은 런던에 있어요. 왜 그럴까요? 답을 찾으려면 1798년 원정의 시작부터 따라가야 해요.

먼저 출발이에요. 프랑스 함대는 1798년 5월 19일 툴롱을 떠났어요. 원정군은 7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어요. 다음 날인 7월 2일에는 도시를 점령했어요.

원정 규모는 컸어요.

  • 보병 약 3만 명
  • 기병 2,800명
  • 야포 60문, 공성포 40문
  • 수송선 약 300척, 그리고 이를 지키는 전열함 13척과 프리깃 7척

육지 싸움은 처음에 순조로웠어요. 프랑스군은 1798년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에서 이겼어요. 상륙한 지 3주 만의 승리였어요. 문제는 바다에서 터졌어요.

원정은 왜 실패했나요? 아부키르만(나일) 해전이 결정타였어요

원정의 흐름을 바꾼 사건은 1798년 8월 1일 나일 해전이에요. 이집트 아부키르만에서 영국과 프랑스 함대가 맞붙은 싸움이에요. 피라미드 전투 승리 후 11일 만이었어요. 넬슨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아부키르만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대를 공격했어요.

결과는 프랑스의 참패였어요. 아부키르에 있던 프랑스 전열함은 13척이었어요. 기함 로리앙(L'Orient)은 폭발했어요. 나머지 다수는 영국군에 붙잡히거나 바닥에 걸려 움직이지 못했어요. 빌뇌브 제독은 전열함 2척(기욤 텔·제네뢰)만 이끌고 빠져나왔어요.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기함 로리앙이 폭발하는 장면을 그린 역사화입니다.
나일 해전을 그린 역사 회화 자료입니다. 출처: George Arnald, The Destruction of L'Orient at the Battle of the Nile (1827), Wikimedia Commons

해전의 손실은 배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나일 해전이 남긴 결과는 크게 세 가지예요.

  • 고립: 바다가 막혀 프랑스 본국에서 병력을 더 받을 수 없게 됐어요.
  • 자금 손실: 로리앙과 함께 원정 군자금과 몰타에서 거둔 약탈품도 바다에 가라앉았어요.
  • 새 적의 등장: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이 세 가지는 육지에서 전투를 이겨도 풀리지 않는 문제였어요. 병력과 돈을 채울 길이 끊긴 채로 원정군은 이집트에서 3년을 더 버텨야 했어요.

시리아 원정·페스트·나폴레옹 귀국: 원정은 어떻게 끝났나요?

나일 해전 뒤에도 실패가 이어졌어요. 또 하나의 실패 요인으로 꼽히는 것이 시리아 원정이에요. 프랑스군은 아크레(생장다크르) 요새를 8차례 공격했어요. 끝내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어요. 페스트 같은 질병도 원정군을 무너뜨린 요인이었어요.

1799년 여름, 총사령관이 바뀌었어요. 보나파르트는 1799년 8월 22일 밤 몰래 프랑스행 배에 올랐어요. 10월 9일 프랑스에 도착했어요. 이집트에 남은 군대는 클레베르 장군이 맡았어요. 출발일은 대부분 8월 22일 출항으로 적지만, 8월 18일 카이로를 떠났다고 적은 자료도 있어요.

클레베르는 이 교대를 반기지 않았어요. 클레베르는 보나파르트에게 속았다고 느꼈어요. 보나파르트가 항복 책임을 피하려고 임무를 버렸다고 의심했거든요.

마지막 단계는 이렇게 흘러갔어요.

  1. 1800년 6월 14일 클레베르가 암살됐어요. 메누 장군이 지휘권을 넘겨받았어요.
  2. 1801년 6월 25일 카이로의 프랑스군이 벨리아르 장군 지휘 아래 항복했어요.
  3. 1801년 9월 2일 메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항복했어요. 이로써 원정이 끝났어요.
1798년 출항부터 1801년 항복까지 이집트 원정의 주요 사건 순서를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나폴레옹 재단 연표를 바탕으로 정리한 원정 흐름도입니다.

기간을 한번 계산해 볼까요? 툴롱 출항이 1798년 5월 19일, 알렉산드리아 항복이 1801년 9월 2일이에요. 둘 사이는 3년 3개월 남짓이에요.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에 머문 기간은 따로 봐야 해요. 상륙일 1798년 7월 1일부터 출항일 1799년 8월 22일까지예요. 1년 1개월 반가량이죠. 원정 기간의 3분의 2가량은 보나파르트 없이 흘러간 셈이에요.

원정에 동행한 학자단은 무엇을 남겼나요?

군사 원정이 무너지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학술 활동이 이어졌어요. 이 원정에는 군인만 간 게 아니었어요. 원정군과 함께 이집트 땅을 밟은 학자는 167명이었어요. 모두 과학예술위원회(Commission des sciences et des arts) 소속이었어요.

학자들은 이집트 현지에 연구 기관을 세웠어요. 1798년 8월 22일 이집트 연구소(Institut d'Égypte)가 문을 열었어요. 위원회 학자 중 36명이 회원이 됐어요. 몽주가 소장을, 보나파르트가 부소장을 맡았어요.

날짜를 나란히 놓으면 대비가 선명해요. 나일 해전은 8월 1일, 연구소 설립은 8월 22일이에요. 함대를 잃고 고립된 지 3주 만에 연구소를 세운 거예요. 원정의 군사적 실패와 학술적 성과는 이렇게 같은 시기에 벌어졌어요.

이 원정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 하나가 로제타석이에요. 다만 로제타석을 처음 찾은 사람은 연구소 학자가 아니었어요. 요새 공사를 하던 공병 장교였어요.

로제타석은 누가 찾았고, 어떻게 영국 대영박물관으로 갔나요?

로제타석은 1799년 라시드 부근에서 프랑스군이 찾았어요. 라시드는 로제타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집트 도시예요. 나일 해전 이듬해의 일이에요.

발견 경위는 이렇게 알려져 있어요.

  1. 프랑스군은 라시드 부근 요새를 넓히는 공사를 하고 있었어요. 이 요새는 뒤에 생쥘리앵 요새로 불렸어요.
  2. 공사 중 낡은 벽을 헐다가 공병 장교 부샤르(Bouchard, Boussard로도 써요)가 돌을 찾았어요.
  3. 부샤르는 발견 사실을 메누 장군에게 보고했어요.
  4. 메누는 돌을 알렉산드리아의 자기 집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했어요.

발견 날짜는 자료마다 달라요. 통상 기념일은 7월 15일이에요. 이집트 관광유물부는 초기 프랑스 보고서를 따라 7월 19일을 기념해요.

'1798년 7월 19일'로 적은 자료도 있는데, 1799년을 잘못 적은 것으로 보여요. '1799년 8월'로 적은 자료도 있어요. 확실한 것은 1799년 여름이라는 것까지예요.

그럼 돌은 어떻게 영국으로 갔을까요? 앞에서 본 메누 장군이 열쇠예요. 부샤르의 보고를 받고 돌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게 한 사람이 메누였어요. 2년 뒤 바로 그 알렉산드리아에서 항복한 사람도 메누였어요.

1801년 항복 조약(알렉산드리아 조약) 제16조가 유물의 운명을 정했어요. 이 조항에 따라 로제타석을 비롯한 대형 고대 유물이 영국에 넘어갔어요. 프랑스 학자들이 모은 연구 대상이 전쟁 결과에 따라 승자에게 간 거예요.

영국으로 가는 길은 이랬어요.

  1. 터너 소장이 로제타석을 영국 군함 HMS 레집시엔(L'Égyptienne)에 실었어요.
  2. 배는 1802년 2월 영국 포츠머스에 도착했어요.
  3. 1802년 3월 11일 돌을 런던 고고학회(Society of Antiquaries)에 맡겼어요.
  4. 같은 해 말 대영박물관으로 옮겼어요.
로제타석이 발견된 뒤 대영박물관에 들어가기까지의 단계를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버지의 『로제타석』을 바탕으로 정리한 이동 경로입니다.

로제타석은 국왕 조지 3세의 이름으로 대영박물관에 기증됐어요. 1802년부터 지금까지 이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어요. 돌에는 '1801년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노획'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요.

그러니까 로제타석은 찾은 쪽과 가져간 쪽이 달랐던 경우예요. 찾은 쪽은 프랑스군이고, 가져간 쪽은 항복을 받은 영국군이에요. 이 차이를 만든 출발점이 3년 전 나일 해전이었어요.

샹폴리옹 해독과 이집트의 반환 청원은 어디까지 왔나요?

로제타석이 이름을 남긴 이유는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실마리가 됐기 때문이에요. 프랑스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1822년 해독의 돌파구를 열었어요. 샹폴리옹은 콥트어 지식을 바탕으로 삼았어요.

시간 간격을 따져 볼까요? 발견(1799년)부터 해독 돌파구(1822년)까지는 23년이 걸렸어요. 돌이 대영박물관에 들어간 1802년부터 따지면 20년이에요. 돌은 영국에 있었지만 해독의 돌파구는 프랑스 학자가 열었어요.

로제타석을 둘러싼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에요. 이집트 고고학자 자히 하와스가 반환 청원을 이끌고 있어요. 청원은 2022년에 시작됐고 서명자는 약 35만 명이에요. 하와스는 서명이 100만 명에 이르면 국제 캠페인을 시작하겠다고 밝혔어요. 국제 캠페인은 아직 시작 전이고, 100만 명 달성을 전제로 한 계획이에요.

자주 묻는 질문

이집트 원정군은 정말 5만 명이었나요?

자료에 따라 달라요. 약 5만 명으로 적는 자료가 있고, 3만5천 명으로 적는 자료도 있어요. 보병 약 3만과 기병 2,800 등으로 나눠 적는 자료도 있어요. 육군 병력만 보면 3만여 명이라고 쓰는 편이 근거가 분명해요.

학자는 정확히 몇 명이었나요?

출처마다 숫자가 달라요. 167명으로 적는 자료가 있어요. 165명, 154명, 160명으로 적는 자료도 있어요.

로제타석은 지금 어디서 볼 수 있나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볼 수 있어요. 1802년부터 이곳에 전시되고 있어요. 이집트에서 반환 청원이 진행 중이지만, 2026년 7월 보도 기준으로 돌은 대영박물관에 있어요.

마무리

이집트 원정은 1798년 나일 해전으로 고립되면서 기울었어요. 그 뒤 시리아 원정 실패와 질병을 거쳐 1801년 항복으로 끝났어요. 로제타석은 그 원정 중 1799년에 발견됐지만 항복 조약 제16조에 따라 영국으로 갔어요. 대영박물관에서 로제타석을 볼 계획이라면 돌에 새겨진 '1801년 노획' 문구를 한번 찾아보세요. 그 문구와 함께 이 경위를 떠올려 보면 돼요. 반환 문제의 흐름이 궁금하다면 하와스의 청원이 100만 명에 이르는지를 지켜보면 돼요.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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