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성이 없다는 뜻이에요. 여기서 실존은 지금 여기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에요. 본질은 어떤 것이 '무엇인지'를 정하는 성질이나 쓰임새예요. 사람은 먼저 세상에 존재해요. 그 뒤 자기 선택과 행동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만들어 가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기 삶 전체에 책임을 진다고 봤어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무슨 뜻인가요?
사르트르는 이 명제를 이렇게 풀었어요.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세상에 나타나고, 그 뒤에야 자신을 규정해요. 중요한 건 순서예요. '무엇인지'가 먼저 정해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태어난 다음 살아가면서 '무엇인지'가 정해져요.
사르트르는 이 생각을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라고 소개했어요. 이 생각이 나오는 곳이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예요. 아래에서는 그냥 '강연'이라고 부를게요. 강연 영역본에서 '제1원칙'이라고 부른 문장은 조금 달라요. "인간은 스스로 만든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예요.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주장이에요. 실존이 먼저라면, 인간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만든 결과로만 정해지니까요.
그러니까 이 명제에는 세 가지가 들어 있어요.
-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본성이나 설계도는 없어요.
- 인간은 선택과 행동으로 자신을 만들어 가요.
-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에게 있어요.

이 명제의 뿌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한 구절에 있어요. 사르트르가 그 생각을 나중에 짧은 경구로 다시 표현한 거예요. 하이데거의 생각을 짧게 압축한 말로 볼 수 있어요.
사르트르는 이 명제를 언제, 어디서 말했나요?
이 명제가 널리 알려진 계기는 강연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예요. 강연은 1945년 말 파리에서 열렸어요. 청중은 수천 명이었어요. 강연 내용은 1946년에 책으로 나왔어요.
강연 날짜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어요. 어떤 자료는 강연일을 1945년 10월 29일로 적고, 책은 이듬해 나왔다고 해요. 반면 영역본 머리말에는 '1946년 강연'이라고 적혀 있어요. 강연은 1945년, 출간은 1946년으로 나누어 기억하면 헷갈리지 않아요.
이 명제는 강연에만 나오는 게 아니에요. 사르트르는 대표작 『존재와 무』에서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고 썼어요. 강연에서는 종이칼 같은 비유로 이 생각을 설명했어요.
종이칼과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요?
사르트르가 강연에서 든 대표 비유가 '종이칼'이에요. 종이칼은 봉투나 책장을 자르는 작은 칼이에요. 장인은 종이칼을 만들기 전에 그 개념을 먼저 머릿속에 둬요. 무엇에 쓰는지, 어떻게 만드는지도 미리 알아요.
그래서 종이칼은 본질이 실존보다 먼저예요. '종이를 자르는 도구'라는 정의가 먼저 있고, 실물은 그다음에 생겨요. 다 만들어진 종이칼은 그 정의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사르트르는 이 비유를 전통적인 인간관과 연결해요. 신이 인간을 설계했다고 보면 어떻게 될까요? 신의 마음속 '인간' 개념이 장인 머릿속의 종이칼 개념과 같은 역할을 해요. 이 관점에서는 인간도 설계도에 맞춰 만들어진 존재가 돼요.
사르트르의 인간은 달라요. 인간을 미리 설계한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인간에게는 먼저 주어진 정의가 없어요. 세 경우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보여요.
| 대상 | 개념이 먼저 있나요? | 무엇이 그것을 정하나요? |
|---|---|---|
| 종이칼 | 있습니다(장인의 머릿속) | 장인의 설계 |
| 신이 설계한 인간(전통 관점) | 있습니다(신의 마음속) | 신의 설계 |
| 사르트르가 말하는 인간 | 없습니다 | 그 사람 자신의 선택과 행동 |
종이칼은 자기가 무엇인지 고를 수 없어요.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기가 무엇인지 계속 정해요. 이 차이가 '본질이 앞서는 존재'와 '실존이 앞서는 존재'의 차이예요.
정해진 인간 본성이 없다면 성격은 어디서 오나요?
사르트르의 답은 '행동에서 온다'예요. 강연에서 그는 "겁쟁이는 스스로를 겁쟁이로 만들고, 영웅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다"고 말해요. 겁쟁이는 자신의 결정으로 겁쟁이가 되는 거예요.
이 말은 성격을 타고난 기질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나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서"라는 설명은 사르트르의 틀에서 성립하지 않아요. 겁을 내는 선택을 반복한 결과가 '겁쟁이'라는 모습이에요.
예를 들어 볼게요. A씨는 회의에서 의견을 말할 기회가 올 때마다 입을 다물어요. A씨는 "나는 소심하게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사르트르의 시각에서는 순서가 반대예요. 말하지 않기로 한 선택들이 쌓여 '소심한 A씨'를 만들었어요. 같은 논리로, 다음 회의에서 다른 선택을 하면 A씨의 모습도 그 선택만큼 달라져요.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았다는 건 희망이에요. 핑계를 댈 '타고난 본성'이 없다는 건 부담이에요.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는 말은 책임과 어떻게 이어지나요?
사르트르는 강연에서 인간이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고 말해요. 인간은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일단 세상에 던져진 뒤에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져요. 자유를 고른 적이 없는데 자유를 떠안았다는 뜻에서 '선고'라는 말을 써요.
이 대목을 간단히 줄이면 이래요. 우리 뒤에는 변명이 없고, 앞에는 정당화가 없어요. 우리 선택과 계획에 대한 책임은 오직 우리에게 있어요. 그리고 이 자유를 깨달으면 흔히 불안이 따라와요.
왜 불안할까요?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에요. 본성 탓도, 정해진 규칙 탓도 할 수 없어요. 선택의 무게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와요.
'모든 인간에 대한 책임'은 무슨 뜻인가요?
사르트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요.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만 책임지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말해요. 선택이 인류의 상을 만들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삶을 고르면,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그림을 하나 내놓는 일이 돼요.
예를 들어 볼게요. B씨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직하게 말하기로 선택해요. B씨는 자기 한 사람의 문제만 정한 게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서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는 인간상을 세상에 내놓은 셈이에요. 그래서 사르트르의 책임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서요.
어떤 윤리도 대신 선택해 주지 않는다: 사르트르의 학생 일화
강연에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어요. 한 제자가 사르트르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어요. 어머니 곁에 남을지, 자유프랑스군에 합류할지 정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두 선택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어요.
사르트르는 어떤 윤리 체계도 이 답을 대신 정해 주지 않는다고 봤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했어요. "너는 자유다, 그러니 선택하라, 즉 발명하라."
이 답은 무책임한 회피가 아니에요. 기존 규칙이 정답을 주지 못하는 순간, 선택하는 사람이 스스로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발명하라'는 말이 이 점을 보여 줘요.
이 일화를 "아무거나 고르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돼요. 흔히 그렇게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데, 사르트르의 요점은 반대예요. 무엇을 고르든 그 선택이 곧 나를 만들고,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예요.
'마음먹으면 뭐든 된다'와 사르트르의 자유는 어떻게 다른가요?
'선택으로 자신을 만든다'는 말은 "의지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로 오해받기 쉬워요. 하지만 사르트르의 자유는 제멋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에요. 늘 상황과 맥락을 함께 지닌 자유예요.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은 시간이 지나며 달라졌어요. 1940~50년대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을 거치며, 사르트르는 초기 자유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었다고 깨달았어요. 마음속에서만 자유를 다루었다는 반성이에요. 그 뒤 자유를 '상황 속의 자유'로 이해하게 됐어요.
이 변화를 어떻게 볼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달라요. 사르트르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절대적 자유론'에서 구체적 조건의 분석으로 옮겨 갔다고 보는 설명이 있어요. 동시에 이것이 단절인지 이어지는 발전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어요. 사르트르가 초기에도 자유를 상황 속에서 봤다는 설명도 있어요.
두 생각의 차이를 예로 들면 이래요.
- '마음먹으면 뭐든 된다': 가난, 시대, 몸의 조건 같은 제약이 의지 앞에서 사라진다고 봐요.
- 사르트르의 '상황 속의 자유': 제약은 실제로 있어요. 다만 그 상황에 어떻게 응답할지는 여전히 내가 고르고, 그 응답에 책임을 져요.
앞의 학생 일화도 같은 구조예요. 전쟁과 가족이라는 상황은 학생이 고른 게 아니에요. 그 상황 안에서 어느 쪽을 택할지가 학생의 몫이에요.
자주 묻는 질문
실존주의자들은 모두 이 명제에 동의했나요?
실존주의와 관련된 인물은 여럿이에요.
- 19세기 선구자: 키르케고르, 니체
- 20세기 독일: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 프랑스: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마르셀, 메를로퐁티
- 스페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우나무노
그런데 스스로를 '실존주의자'라고 밝힌 사람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뿐이에요. 다만 이 명제의 뿌리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있고, 사르트르가 이를 짧은 경구로 다시 표현했어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와 '인간은 스스로 만든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는 다른 말인가요?
같은 주장을 두 방향에서 말한 거예요. 앞 문장은 순서를 말해요. 존재가 먼저이고 정의가 나중이에요.
뒤 문장은 그 결과를 말해요. 정의가 나중에 생긴다면, 그 정의는 내가 만든 것밖에 없어요. 강연 영역본은 뒤 문장을 '실존주의의 제1원칙'이라고 불러요.
이 명제는 신이 없다는 주장인가요?
사르트르는 종이칼 비유를 신이 인간을 설계했다는 전통 관점과 대비해요. 그 관점에서는 신의 마음속 '인간' 개념이 본질 역할을 해요. 사르트르의 명제는 이런 설계도를 전제하지 않을 때 인간에게 무엇이 남는지를 물어요. 그 답이 '스스로 만드는 존재'예요.
마무리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인간에게 정해진 본성이 없고, 선택과 행동으로 자신을 만든다는 뜻이에요. 그 대가로 인간은 변명 없이 자기 선택에 책임져요. 그 선택은 인간상 전체에 대한 책임으로 이어져요. 실존주의를 처음 접하는 분이라면 종이칼 비유와 겁쟁이 예부터 이해하면 돼요. 리포트나 발표를 준비하는 대학생이라면 '상황 속의 자유'까지 짚어 두는 편이 좋아요. 이 명제를 '의지만 있으면 다 된다'로 읽는 흔한 오해를 피할 수 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