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 동양 철학

성선설 성악설 차이: 맹자·순자의 본성 정의와 수양법 비교

맹자 성선설과 순자 성악설의 차이를 본성(性)의 정의, '악'과 '위(僞)'의 뜻, 내면 성찰과 예·스승이라는 수양 방법으로 비교하고 두 사람의 공통점도 정리합니다.

알려줌이 박사

· 2026.10.26 수정 · 11분 분량

2026년 10월 25일 기준 · 『맹자』·『순자』 원문(維基文庫)과 스탠퍼드 철학 백과(SEP) 기준

선한 싹을 가리키는 학자와 예를 적은 죽간을 든 학자가 마주 앉아 본성을 논하는 장면입니다.

맹자와 순자는 이름처럼 정반대가 아니에요. 두 사람은 '본성(性)', 곧 사람이 타고난 바탕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뜻으로 썼어요. 선해지는 길도 맹자는 안에서, 순자는 밖에서 찾았고요. 그런데 "누구나 선해질 수 있다"는 결론에는 둘 다 동의했어요.

성선설과 성악설, 핵심 차이는 무엇인가요?

먼저 두 이론을 표 하나로 비교해 볼게요. 차이는 크게 세 군데에서 나요. 본성을 무엇으로 정의했는지, 선이 어디서 나온다고 보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수양하는지예요.

기준 맹자 (성선설) 순자 (성악설)
활동 시기 기원전 4세기 기원전 3세기 (기원전 310년 무렵 출생)
본성(性)의 뜻 누구나 가진 선한 마음의 싹 배우거나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태어나면서 그러한 것
선은 어디서 오나 안에 본래 있음 ("밖에서 녹여 넣은 것이 아니다") 위(僞), 곧 의식적인 노력에서 옴
대표 문장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선한 것은 인위다"
수양 방법 마음으로 생각(思)하고 싹을 넓혀 감 스승과 법의 교화, 예의의 이끎으로 본성을 바꿈(化性)
예(禮)의 출처 사람이 본래 가진 것 성인이 만들어 물려준 것
성인이 될 수 있나 문답 속에 "사람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가 나옴 "길거리의 보통 사람도 우가 될 수 있다"

표에서 보듯 두 사람은 "사람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한 질문에 정반대로 답한 게 아니에요. 같은 '성'이라는 글자에 서로 다른 범위를 담았어요. 그래서 결론 문장은 반대로 보여요. 하지만 실제로 다투는 지점은 따로 있어요. "선이 안에서 자라느냐, 밖에서 들어와 본성을 바꾸느냐"예요.

시기도 확인해 둘 만해요. 순자는 기원전 310년 무렵 태어났어요. 기원전 238년에 살아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요. 맹자의 생몰년은 기원전 372~289년으로 적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다만 맹자가 순자보다 앞선 시대 사람이라는 순서는 분명해요.

맹자 성선설: '본성이 선하다'는 말의 정확한 뜻

맹자의 성선설은 비유 하나로 시작하면 이해하기 쉬워요. 『맹자』 고자상 2장에 이런 말이 나와요.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人性之善也,猶水之就下也)." 물이 아래로 흐르듯, 사람도 선한 쪽으로 흐른다는 거예요.

이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맹자는 우물 이야기를 들어요.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요.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드는 마음이에요. 이 대목은 『맹자』 공손추상(2A6)에 나와요.

우물가로 기어가는 아이를 본 행인이 놀라 손을 뻗는 모습으로 맹자의 측은지심 비유를 보여 줍니다.
맹자의 우물 비유를 표현한 설명용 일러스트입니다.

『맹자』 고자상 6장은 이 생각을 더 분명히 적어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측은·수오·공경·시비의 네 마음을 든 뒤 이렇게 이어져요. "인·의·예·지는 밖에서 나에게 녹여 넣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진 것이다.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弗思耳矣)." 같은 장에 "그 정(情)을 따르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도 있어요.

여기서 중요한 게 있어요. 맹자가 말한 건 "사람은 이미 완성된 선인이다"가 아니에요. 선해질 수 있는 싹(端)을 누구나 타고났다는 뜻이에요. 이 싹을 넓혀 가야(확충) 온전한 덕이 돼요. 싹은 있지만 저절로 나무가 되지는 않아요.

순자 성악설: '악(惡)'과 '위(僞)'는 무슨 뜻인가요?

『순자』 성악편은 첫 문장부터 주장을 밝혀요.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그 선한 것은 위이다(人之性惡,其善者僞也)." 이 문장을 바르게 읽으려면 '성', '악', '위' 세 글자를 하나씩 풀어야 해요.

순자의 성(性): 배울 수 없는 것

순자는 성과 위를 이렇게 나눠요. 배울 수도 없고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는데 사람에게 있는 것이 성이에요. 배워서 할 수 있고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위예요. 곧 순자의 성은 "태어나면서 그러한 것" 전체예요.

순자의 논리는 이래요. 타고난 충동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 해로운 결과가 나와요. 그러니 그 충동 자체를 '선하다'고 부를 수는 없다는 거예요. 순자의 '악'은 사람 속에 악마가 산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버려 두면 나쁜 결과로 흐른다는 말에 가까워요.

'악'은 'evil'과 같은 뜻일까

'악'을 어떻게 옮길지는 학자마다 달라요. 순자의 惡은 '혐오스러운(detestable)'에 가깝다는 풀이가 있어요. 같은 글자를 '오'로 읽으면 '미워하다'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럼 영어 'evil'로 옮기는 건 어떨까요? 아우구스티누스식 악을 뜻하지 않을 때만 받아들일 수 있어요. 'bad(나쁜)'를 더 좋아하는 학자도 있어요. 국내 교재에서는 흔히 '악'으로 그대로 옮겨요.

'위(僞)'는 거짓이 아니에요

오늘날 '僞'는 위조·허위처럼 '거짓'이라는 뜻으로 많이 써요. 하지만 순자의 위는 배우고 노력해서 이룬 것, 곧 인위예요. 의식적인 행동으로 몸에 붙인 습관이라고 보면 돼요. 그래서 "선한 것은 위다"라는 문장은 "선은 가짜다"가 아니에요. "선은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로 읽어야 해요.

수양 방법은 어떻게 다른가요? 내면 성찰과 예·스승

두 사람의 차이가 가장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곳이 수양 방법이에요. 맹자는 안을 들여다보라고 하고, 순자는 밖에서 배우라고 해요. 여기서 예(禮)는 예의나 의례처럼 사람의 행동을 바르게 이끄는 규범을 말해요.

맹자: 마음으로 생각하고 싹을 넓히기

『맹자』 고자상 15장에는 "마음(心)이 맡은 일은 생각하는 것(心之官則思)"이라는 말이 나와요. 앞서 본 고자상 6장의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와 이어지는 말이에요. 선한 마음은 이미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돌아보고 붙잡는 일이 수양의 출발이에요.

다만 맹자의 수양이 혼자 하는 명상만은 아니에요. 싹을 넓히려면 반성(思)과 함께 윤리 교육, 그리고 도움이 되는 환경이 필요해요. 교육과 환경의 몫을 인정한다는 점은 순자와 겹쳐요. 차이는 그 교육이 "이미 있는 것을 키우는 일"이라는 데 있어요.

순자: 스승·법·예의로 본성을 바꾸기

성악편에는 "반드시 스승과 법의 교화(師法之化), 예의의 이끎(禮義之道)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어요. 본성을 그대로 두면 다툼으로 흘러요. 그래서 밖에서 바로잡는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본성을 버리라는 걸까요? 아니에요. 순자의 목표는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化性)'이에요. 타고난 욕구를 없애라는 말이 아니에요. 예를 배우고 스승을 따르며 위를 쌓으면, 욕구가 바른 방향으로 다듬어진다는 뜻이에요.

순자가 말한 본성 변화 과정을 타고난 성에서 스승·법, 예의, 위를 거쳐 성인에 이르는 단계로 보여 줍니다.
『순자』 성악편 원문과 SEP 설명을 바탕으로 정리한 그림입니다.

예시: 같은 상황, 두 사람의 처방

이해를 돕기 위해 가상의 상황 하나로 비교해 볼게요(예시). 학생 A씨가 시험 성적을 위해 친구를 속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해 볼게요.

  • 맹자식으로 보면: A씨에게도 옳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어요. A씨가 할 일은 그 마음을 돌아보고(思) 붙잡아 키우는 거예요.
  • 순자식으로 보면: 이익을 좇는 마음은 타고난 성이에요. A씨에게 필요한 건 스승의 가르침과 예라는 바깥 기준이에요. 그 기준을 따라 행동을 반복해 위를 쌓아야 해요.

두 처방 모두 "A씨는 바뀔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요. 다른 점은 고치는 힘이 어디 있느냐예요. A씨 안에 이미 있느냐, 밖에서 배워 들여야 하느냐죠.

예(禮)는 어디서 오는가: 안에서 자라나, 밖에서 만들어지나

예의 출처에서도 두 사상이 갈려요. 맹자에게 예는 인·의·지와 함께 "밖에서 녹여 넣은 것이 아니라 본래 가진 것"이에요. 예의 뿌리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뜻이에요.

순자에게 예는 성인이 만든 거예요. 성인은 절제되지 않은 욕망이 다툼을 낳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예를 만들었어요. 보통 사람은 성인이 물려준 예를 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순자는 봐요.

그러니까 맹자는 예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순자는 "사람이 만든 제도"로 봐요. 순자 사상에서 예와 스승의 비중이 큰 이유도 여기서 나와요. 본성 안에 예가 없으니, 예를 가르쳐 줄 바깥 통로가 반드시 있어야 해요.

맹자와 순자는 정말 정반대일까: 같은 점 세 가지

이름만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정반대예요. 하지만 둘 다 모든 사람이 선해질 수 있다고 보았어요. 차이는 성을 정의하는 방식과 수양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있어요. 같은 점을 세 가지로 나눠 볼게요.

첫째,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어요. 성악편에는 "길거리의 보통 사람도 우(禹)가 될 수 있다(塗之人可以爲禹)"는 말이 있어요. 『맹자』 고자하 2장에는 조교라는 사람이 묻는 장면이 나와요. "사람은 모두 요순이 될 수 있다는데 그렇습니까"라는 질문이에요. 본성을 악하다고 한 순자도 사람의 가능성을 닫지 않았어요.

둘째, 둘 다 수양과 교육을 요구했어요. 맹자도 싹을 저절로 두지 않았어요. 반성과 교육, 환경으로 키워야 한다고 보았어요. 순자는 스승과 예를 더 강하게 요구했을 뿐이에요. "맹자는 교육이 필요 없다고 했다"는 서술은 틀려요.

셋째, 순자는 맹자의 이론을 직접 겨냥해 글을 썼어요. 순자의 성악편은 맹자와 논쟁하는 형식으로 쓰였어요. 원문에서 순자는 "맹자는 '지금 배우는 사람은 본성이 선하다'고 말한다"고 인용한 뒤 반박해요. 다만 그 무렵 맹자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 가능성이 커요. 직접 마주 앉은 토론이 아니라, 맹자의 이론을 겨냥한 글이라는 뜻이에요.

시험에서 자주 헷갈리는 지점과 실수

두 사상을 공부할 때 헷갈리기 쉬운 진술을 모았어요. 아래 예시 문장의 판단 근거는 모두 앞에서 본 원문 내용이에요.

  • "순자는 인간이 선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 틀림. 순자는 길거리의 보통 사람도 우가 될 수 있다고 했어요.
  • "순자의 위(僞)는 거짓 선을 뜻한다" → 틀림. 위는 배우고 노력해서 이룬 것, 곧 인위예요.
  • "순자는 본성을 없애야 한다고 보았다" → 틀림. 목표는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化性)이에요.
  • "맹자에게 예는 외부의 규범이다" → 틀림. 맹자는 인·의·예·지를 본래 가진 것이라고 했어요.
  • "맹자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완전히 선하다고 했다" → 주의. 성선설을 "본성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강하게 풀이하는 건 맹자 자신의 말이 아니에요. 주희가 나중에 붙인 해석이에요. 맹자 원문은 '성선(性善)', 그리고 "그 정을 따르면 선을 행할 수 있다" 정도로 표현해요.

한 가지 더 알아 둘 연결고리가 있어요. 한비(기원전 233년 사망)와 이사(기원전 208년 사망)는 순자의 제자였어요. 후대 비평가들은 이 관계를 들어 순자를 법가와 엮어 비난했어요. 하지만 이건 상투적인 비판이에요. 순자가 수양에서 강조한 건 예와 스승이라는 점을 함께 기억해 두면 좋아요.

공부는 이렇게 하면 돼요. 두 사상을 외울 때는 "성의 정의 → 선의 출처 → 수양 방법 → 예의 출처" 네 칸을 순서대로 채워 보세요. 위의 비교표에 이 네 가지가 모두 들어 있어요. 지문에 '안/밖', '확충/교화', '사단/예의'가 나오면 어느 쪽인지 바로 가를 수 있어요.

마무리

맹자와 순자는 '성'에 담은 뜻이 달라서 반대 결론처럼 보였을 뿐이에요. 누구나 선해질 수 있다는 데는 같았어요. 수험생이라면 이 대비를 먼저 잡아 보세요. "선의 싹이 안에 있다(맹자) / 예와 스승으로 본성을 바꾼다(순자)." 입문자라면 '악'과 '위'를 오늘날의 뜻으로 읽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요.

출처

관련 글

더 보기